[스크랩] 산다는 것

필부 2007. 1. 11. 18:17
 

어떤 생명체가 살아있다 것은 죽어 정지되는 멈춤의 반대쪽으로 창조와 소멸이라는 속과 겉과 같이 밝음과 어둠의 대칭적 표현이겠지요. 늙음이란 젊음과 비교되어 표현되는 것이고요. 현재 우리는 살아있음으로 늙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늙었기에 죽음의 문에 임박했다고 체념할지 몰라도 끝내는 육체적 질병에 의해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결국 자연사란 노쇠해진 육신이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해 정지됨을 의미한다 하겠지요. 살아있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며 창조적인 활동에 의한 성장과 연장이어야 합니다. 꼭 그것이 육체적 생명체로서 생의 존속만을 추구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복잡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불쌍하게도 이성이라는 기능을 부여 받았기에 사유를 통해 성취와 평화를 누려야할 형이상학적 존재이기도 합니다. 영과 육이 어우러진 생명체지요. 아무리 신체적으로 건강해도 마음이 가난하고 황폐해 있다면 그 건 살아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살야할 이유를 제공하는 추구라는 욕망이 함께해야 합니다. 제가 알기로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마감하는 자살이라는 행위는 인간에게만 있는 줄 압니다. 이는 살아갈 욕심과 의지를 자체적으로 가진 생명체라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또한 죽음이란 우리의 곁에서 함게 움직이는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즉 살아있기에 죽음이 함께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늙어 병들어 죽는 죽음이야 짧은 시간이지만 준비할 시간을 줍니다. 허나, 사고사나 돌연사로 인한 죽음도 있기에 우리는 죽음이라는 종말의 실체를 잘 알고 살아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젊음이란 화려한 봄의 꽃밭이라면 늙음은 산을 태우는 단풍과 같은 것입니다. 꽃이기는 마찬가지겠지요. 젊음보다 늙음에서 안온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자족하고 수용할 수 있는 지혜가 생겼다는 의미가 아닐련지요. 죽음을 승화시킬 만큼 성장한 노년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영면이라는 끝이 있기에 우리를 더욱 인간적이게 만드는 것은 아닐련지요. 한계상황적 생명체라는 자각은 타협과 절충이라는 여유를 주어 더불어 살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 아닐련지요. 호수님의 늙음에 대한 답글로 적으려다 중언부언을 했습니다. 아무쪼록 사는 날까지 감사하며 살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 물질적인 세상에서 정신적인 또 다른 세계의 여행으로 살게 합니다. 이 세상을 축복하는 감사로 충만한 은혜를 간직할 수 있다면 여한이 있겠습니까. 첨언 다시 읽으니 말이 되는 성도 싶고 말장난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죽음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등에 업고 사는 게 인간들이지요. 뭐 그리 대단한 존재들이라고 평생을 다해 읽어도 다 읽지 못할 공부거리를 만들어 두고, 고뇌하고 또 번민하며 살아들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그렇지요. 얼마나 산다고 그리워하고 슬퍼하며 가슴앓이를 하며 사는지요. 다 부질없는 짓이다 손을 놓으면 허무하기 이를데 없는게 세상살이인 것을. 오늘도 허전해 하며 옛 낙서를 들춰 봅니다.

출처 : 어부림 ( 魚付林 )
글쓴이 : 거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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