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인가.2 / 김 종 욱 2. 불교의 인간본성론(終)

필부 2006. 12. 13. 23:40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인가.2 / 김 종 욱 불교에서는 법성과 공성으로서의 진여실상이 만물의 근본이고, 불성은 이런 법성과 다르지 않으므로, 불성 역시 기본적으로는 본체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중국에서 성이 체화(體化)되어감에 따라, 불성도 본체화되며, 이렇게 내 속에 있는 만법의 근원으로서 본체화된 불성을 일러 본성(本性) 또는 자성(自性)이라 부른다. 그래서 혜능은 “스스로 본성을 보니(自見本性)” “자심에서 진여 본성이 문득 현현한다(自心頓現眞如本性).” “만법은 자성을 따라 생하니(萬法從自性生)” “만법은 자성에 있다(萬法在自性).”라고 말한다. 이 때의 자성은, 공은 곧 무자성이라 하여 부정되는 중관불교의 자성과는 다른 것이다. 혜능의 자성은, “만경은 스스로 여여(如如)한 것이니, 만약 이렇게 본다면, 바로 무상보리인 자성인 것이다(萬境自如如 若如是見 卽是無上菩提之自性也).”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이(無二)의 진여본성이 차별 없이 여여하게 제 스스로 있음(自在)을 표현하는 말이다. 연기하여 여여한 상태에 대해서, 그런 상태에선 고립적 실체로 있을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하면 무자성(無自性)이고, 그런 상태는 분별에 의해 좌우됨 없이 그 자체로 본래 자재하다는 점에 주목하면 자성(自性)이다. 따라서 진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무자성과 자성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진여 공성은 무자성이기도 하고, 자성이나 실성(實性)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진공(眞空)을 묘유(妙有)의 실상(實相)으로 긍정하는 태도인데, 이런 태도를 갖고 있기에 혜능은 “자성은 진공이다(自性眞空).”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성과 자성이 모두 공성이라고 하는 것은, 비록 불성을 본체로 간주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실체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서양철학에서 본체(noumenon)는 정신(nous)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불변의 예지계를, 현상(phenomenon)은 이런 불변의 본체를 토대로 드러나는(phainomai) 덧없는 감성계를 의미하는 데 반해서, 중국철학에서 체(體)는 한 몸과도 같이 융화된 전체를, 용(用)은 이런 전일적 체 내에서의 역동적이고도 다양한 작용들을 가리킨다. 서양철학에서는 본체와 현상이 실체적으로 분립하지만, 중국철학에서는 체와 용이 상즉(相卽)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 불교에서의 본체도 인간과 만물을 떠나 실체적으로 독립 실재하는 별유일물(別有一物)이거나, 만물을 실제로 생성시키는 우주론적 발생 기능을 지닌 초월적 주체이거나 한 것이 아니다. 만법 중 진여의 공성을 벗어나 성립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이렇게 만물을 하나로 조화시키는 전일적 터전이 되기에 그저 본체라 할 뿐이며, 이런 공성으로서의 본체는 무상이면서도 실상(無相而實相)인 불이(不二)의 존재이므로, 특정의 실체로 한정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실체화될 수 없는 공성이 바로 불성의 내용인 이상, 불성은 공성과 연기성의 자각 가능성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희망적 어법으로 간주해야지, 그런 불성을 실체적으로 미리 주어진 어떤 성품으로 고정화시켜서는 곤란하다고 하겠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중국의 불교인들에게 불성의 인성화는 불성이 인간의 본성으로서 자신의 마음 속에서 드러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고, 불성의 본체화는 그렇게 심성화된 불성이 만법의 근본인 진여 공성과 다르지 않다는 자각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이제 우리는 불교에서 인간의 본성은 불성이며, 그것도 ‘공성으로서의 불성’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공성으로서의 불성’이 철학적으로 의미하고 있는 바를 간략히 살펴보기로하자. 첫째, 공성으로서의 불성은 인간 본성의 비고정성과 그로 인한 자유의 가능성을 함축한다. 서양철학이나 전통 중국철학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본능적 요소(instinct, 生)와 본질적 요소(essence, 心)로 구분한 후, 동물성과 이성,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악성과 선성, 자연성과 도덕성 중에서 어느 한 측면을 부각시켜 인간의 본성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이런 특정의 측면으로 한정될 경우, 그런 본성의 능력을 지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고, 더욱이 인간 자신이 그런 요소에 의해 제약받음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성을 특정한 것으로 한정시키는 것은 그런 본성의 장악을 통해 타자를 지배하려는 미리 전제된 의도 속에서 나온 것이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그런 본성의 이름으로 지배의 주체 자신이 속박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연기적 시각에서 보자면, 본능의 욕망(愛)과 본질의 이성(識)은 모두 자기의 지속적 존립을 의도로 한 의지 활동(行)의 산물로서, 연기성과 공성에 대한 무지(無明)로 인해 야기된 것들이다. 연기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고정된 실체로 환원될 수 있는 단순성(simplicity)의 존재가 아니라, 상호 연관된 중층적 구조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복잡성(complexity)의 존재이며, 이런 관계의 망 속에서의 인간의 본성은 공성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성으로서의 불성을 본성으로 하는 인간은 욕망의 충동이나 이성의 사유나 맹목의 의지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존재이며, 그런 것들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자유는 욕망과 사유와 의지의 자의적 구사나, 그런 것들의 주체로서의 자아의 자발성이 아니라, 욕망과 사유와 의지의 중도적 극복이며, 그런 것들을 공화(空化)시키는 진여 실상의 수용성이다. 자유(自由)란, 그 말의 기원인 선(禪)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이성적 ‘자아로부터 비롯함(自我由)’이 아니라, 진여의 ‘자성으로부터 비롯함(自性由)’인 것이다. 사유하면서 그런 사유의 능력(이성)을 자신만의 우월성으로 확대 재생산해 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사유하면서도 사유를 떠나는 머물지 않음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며(念而不念 無住者 爲人本性)”, 그것이 곧 공성의 자유이다. 둘째, 공성으로서의 불성은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을 화해시킬 수 있는 조화로운 인간본성론을 창출할 수 있다. 불성과 법성이 모두 공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자연의 본성이 공성으로서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성으로서의 인간의 본성은 인간의 종적 우월성의 표시가 아니라, 자연과의 불이(不二)적 연관성의 징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인간의 우월적 본성을 빙자한 어떠한 인간 중심주의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성을 가진 동물’이라기보다는 ‘공성으로서의 불성을 지닌 중생’인 인간은 이성을 무기로 한 지배의 화신도 아니고, 동물적 욕망의 노예만도 아니다. 그런 인간은 자신과 한 생명의 그물로 연결된 일체의 존재에 대해 끝없는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자신이 중심임을 주장하지 않는 탈중심의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중심주의의 올바른 극복은 서양의 동물행동학에서처럼 인간을 동물과 동질화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을 비롯한 일체생명과 인간과의 상호보완적 관계성(연기 공성)을 자각하여 회복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연기와 공이라는 비실체적 상호의존성을 공통의 본성으로 하여 자연과 인간이 화해를 이룰 때, 진정한 생태학적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