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인가.2 / 김 종 욱 2. 불교의 인간본성론(1)

필부 2006. 10. 23. 03:40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인가.2 / 김 종 욱 이제 불교에서의 인간본성론을 다룰 차례가 되었다. 이에 대한 논의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기본 시각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서양에서 인간에 관한 논의는 인간을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종속 관계, 또는 같은 피조물인 인간과 자연 사물 간의 우열 관계에서 다루고, 중국에서는 인간을 천지의 도와의 도덕적 합일이라는 천인 관계 속에서 다룬다. 그러나 불교에서 인간은 윤회와 해탈의 과정이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다루어진다. 생명을 가진 사물이 자신이 지은 행위의 영향력(業力)에 따라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띄고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되풀이하며 흘러가는 것을 일러 윤회(輪廻, sam.sa-ra, 흘러감)라 하고, 이런 윤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일러 해탈(解脫, moks.a, 벗어남)이라고 하는데, 정확히 사람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것은 윤회의 여섯 단계(六道) 중 하나인 인(人, manus.ya)이다. manus.ya의 manu가 사유를 뜻한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능히 생각을 가지고 일을 꾸며 사유 관찰하는 고로 마누샤라 이름한다 (以能用意思惟觀察所作事 故名末奴沙).” 그러나 인간은 이런 식의 분별 사유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무분별의 지혜로 전화시킬 수도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각과 신체와 언어를 가지고 있고 “교만을 가지고 있으나 이 교만을 능히 파괴할 수도 있으므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又復人者名有慮慢 又復人者能破慮慢).” 결국 인간이란 그가 어떤 마음과 생각을 가지느냐에 따라 윤회에 머물 수도 해탈을 이룰 수도 있기 때문에, 윤회의 육도(六道 : 地獄, 餓鬼, 畜生, 阿修羅, 人, 天)와 해탈의 사성(四聖 : 聲聞, 緣覺, 菩薩, 佛)은 미계(迷界:어리석음의 세계)와 오계(悟界:깨달음의 세계)라는, 주체자의 마음가짐에 따른 두 가지의 단계로 압축된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유(有)라는 고정적 실체로 간주하여 생각하면 육도의 미계가 생기고, 일체를 공(空) 가(假) 중(中)이라는 비실체적 사유 방식으로 생각하면 사성의 오계가 생기는 것이니, 미오(迷悟)의 그 마음가짐을 떠나 열 개의 세계들이 따로이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소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것도 이처럼 마음가짐에 따라 달리 보이는 세계의 출현 방식을 지적하는 말이지, 조물주의 의지에 의한 창조나 절대적 정신에 의한 구성처럼 추상적 관념론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닌 것이다. 불교에서 인간은 창조신과 피조물, 하늘(天)과 땅(地)이라는 두 실재자 사이에서가 아니라, 오직 그의 마음가짐에 따라 미계(迷界)와 오계(悟界) 사이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존재는 단순한 부유(浮游:이리저리 떠돌아다님)가 아니라, 어리석음을 딛고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는 전미개오(轉迷開悟)의 뚜렷한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인간을 미오의 이중적 복합성과 마음가짐에 따른 전미개오의 가능성으로 규정하는 방식은 불교의 거의 모든 사상에 담겨 있다. 모든 것에는 고정적 실체성이 없어(諸法無我), 영원 불변하지 않는다는 것(諸行無常)을 모른 채 어리석게도 일체에 집착하면 괴로움이 생기지만(一切皆苦), 그것을 체득하여 깨달으면 번뇌의 불꽃이 가라앉는다는(涅槃寂靜) 사법인의 가르침, 그리고 괴로움이라는 현상(苦)을 직시해 괴로움의 발생 과정(集)을 알아내어, 괴로움의 제거 방법(道)을 통해 괴로움의 소멸 상태(滅)에 이른다는 사성제의 가르침 등은 모두 미오 간의 관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특히 십이연기에서 잘 나타난다. 다르마(dharma)에 대해 무지하므로(無明), 명목적인 삶의 의지를 앞세워(行), 물질과 비물질의 일체를 분별 인식한 후(識, 名色, 六入, 觸), 거기서 즐거움과 즐겁지 못함을 느껴(受), 즐거운 것을 갈망하여 집착하니(愛, 取), 그것을 영원히 고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有), 무상한 생노병사에 괴로워한다(生, 老死)는 것이 십이연기의 내용이다.